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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하거나 혹은 소름끼치거나 - [모범생들]에 아쉬운 것들

연극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었던 적도 있었다. 세상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채고, 그 변화의 몸살을 온몸으로 먼저 앓아내는 것이 연극이었다. 그 때, 연극은 고통을 앙다물고 비명을 지르며 세상이 보고싶지 않던 숨겨진 진실을 보여주었다. 세상이 감추고 싶어하면 할수록, 그 누르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연극은 격렬하게 비명을 질러 외면하는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러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연극은 어떠한가? 그 깊고 심원한 눈은 흐려지고, 뜨거운 열정과 용기는 '밤의 오락물'의 간판에 가려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비틀린 눈은 새롭게 바라볼 줄 모르고, 거친 목소리는 나긋나긋 비위를 맞추며 자기검열의 수위를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스스로 한 때의 영광을, 황야에 버티고선 선지자의 역사를 힘없이 쓴웃음으로 흘려버리고 있다. 

비틀린 세상을 꿰뚫어보는 눈이 이야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끝까지 그 추악한 진실을 파헤쳐 들이대주어야 한다. <모범생들>(지이선 작, 김태형 연출)은 서늘한 눈으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뼈아픈 진실을 포착해주었지만, 마지막 순간 그 모습에 '웃음'이라는 가리개를 너무 두텁게 씌워주고 말았다. 이 작품을 초청한 최용훈 극장장은 "...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가 붕괴된 채 이리저리 표류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을 씁쓸하게 대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젊은 작가와 젊은 연출이 포착한 씁쓸한 우리 사회의 모습은 마지막 순간 그들 세대의 '쿨(cool)한' 거리두기와 쌉쌀한 비웃음의 자가당착에 빠져 표류하고 만다. 

상위 3%, 소위 말하는 1등급 대열에 들어서는 것이 인생의 모든 가치이자 의미인 명준의 발버둥은 분명 우리에게 씁쓸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고등학교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압축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은, '타고난 0.3%' 반장 민영의 결혼식이 열리는 '현재'의 화장실에까지 깊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지만 이들의 비틀려진 삶의 모습은 그 어떤 도전에도 직면하지 않고, 입꼬리가 말려올려진 '쓴웃음'에까지 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명준과 수환의 절박한 몸부림에서 시작된 부정행위(컨닝)계획은, 순진한 운동선수 출신 종태를 끌어안고, 소문으로 떠돌던 '시험지를 통채로 사버린다'는 0.3% 반장 민영을 협박하게 되며 위험한 도박으로 부풀어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 부정행위의 긴장은 관객에게 '과거사'라는 '알싸한 추억의 거리'라는 안전망을 제공하면서부터 우리의 현실에서 한발 멀어지고 만다. 한 발짝 떨어진 거리는 대상을 생각해보게 하는 '낯설게 하기'를 지향할 수도 있지만, 관객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덜어주는 편의를 제공하면서 오히려 느긋한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데 함정이 있었다. 

젊고 잘 생긴 '대학로의 F4'라는 남자 배우들은 분명 매끈하고, 나무랄데 없는 연기로 극적행동을 이끌고 나갔다. 그러나 극적행동은 배우의 생명력과 영혼이 입혀졌을 때 공감하기도, 울기도 웃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게 생동하는 생명력을 입지 못한 연기는, 세밀한 웃음의 코드를 염두에둔 무대 비즈니스로 인해 불필요하게 웃음을 남발하며, 그만 피식하고 흩어져버리는 '쓴웃음'을 남기고 문제제기의 추진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장식이나 양념이 너무 많은 요리는 재료가 가진 본래의 숨은 맛을 가려버리게 마련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연출의 구성과 방향설정에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진정 블랙 코미디가 되고 싶었던 것인가? 

"너희들이 군대가서 좆뱅이치고 있을 때, 나는 어학연수 갈거고, 너희들이 대학원 갈 때, 나는 해외유학 갈 거고, 너희들이 회사생활한다고 박박기고 있을 때, 나는 회사 하나 차릴수도 있을 걸?!" 타고난 0.3%는 그렇게 거대한 벽이되어 명준을 가로막는다. 명준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코 넘을 수 없는, 치밀하고 과감하게 처절한 계획을 밀어붙이던 그를 비굴하게 무릎꿇고 통사정하게 만들던 그 0.3%의 진실은, "사회가, 이 학교 밖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여?"라고 외치는 민영의 통렬한 외침에 반향을 일으키며 관객을 향해 날아든다. 이 대사의 힘이 살아 숨쉬었다면, 아마도 관객은 소름끼치는 진실에 모골이 송연해지거나, 얼마간의 면역력이 있다면 최소한 씁쓸함에 가슴이 쓰려와야 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잘못된 댓구로 구성된 명준의 되새김은 관객에게 불쌍한 어릿광대의 자기연민에 빠져들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0.3%의 높다란 절벽은, 무엇이든 면죄부를 부여받던 '모범생들'의 비굴한 현재의 모습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주었어야 했다. 현재에까지 길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그 서늘한 진실과 대면하기에는, 무대는 너무나 멀리 과거의 세피아풍 회상 속으로 깊이 깊이 숨어버리고 말았다. 잘 짜여진 무대와 기능적이고 절제를 선보여준 연출에 비해, 전체적인 구성에서의 느슨함이 남겨준 아쉬움으로 인해 <모범생들>은 모처럼 꺼내든 거울, 사회의 진실된 단면을 정직하고 서늘하게 비추어주는 '연극의 거울'에, 너무나도 아쉬운 잡티를 남기고 말았다. 젊은 그들의 정직한 분투가, 언젠가 차갑고 맑은 거울이 되어 우리 앞에 소름끼치는 '괴물들'을 비추어 줄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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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혼자밥먹는남자 | 2009/02/09 00:40 | 극장의 사잇길 | 트랙백 | 덧글(0)

극장으로 돌아가기로 한 까닭은

이야기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극은 한 때 인생을 걸었던 길이다. 10년을 애둘러 걸어갔다.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가 목덜미를 놔주지 않는 탓도 있지만, 연극의 곤궁함이 견디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연극을 업으로 하는 삶이 평탄한 삶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거야 그전부터도 알고 있었고, 연극의 곤궁함은 생활의 위협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이야기 하는 것이 가진 통찰의 깊이가 울림을 주지 못해서이고, 보여주는 방식이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슴 떨리는 감동도, 삶을 관통하는 지혜도, 도발적인 문제제기도 하지 못하는 연극을 어떻게 지켜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그 화두를 이겨내지 못했다. 너무 어렸던 것이었을까? 

10년을 지낸 후, 서른 살 무렵을 고스란히 삶의 문제와 씨름하며 지내고 니니, 연극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유로워졌다. 얼마간 소박한 이야기라도 진지하게 노력하는 모습은 마음을 끌었다. 예술혼의 극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지하게 삶과 사회에 대해 고민하며 만든 흔적이 있다면 기꺼이 박수를 치게 되었다. 잘 단련된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안무나 무대가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라도 하면 흥에 겨워지기도 했다. 좋은 앙상블이 나올라치면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운을 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공연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 

연극은 여전히 빈곤하다. 상상력이 빈곤하고, 문제의식이 빈곤하고, 통찰력이 빈곤하다. 생활인으로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구태여 응원해야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그들의 어려움보다 주변의 실직이 더 눈을 끌고, 그들의 이야기보다 매일 매일 벌어지는 일터의 현장 이야기가 더 마음을 끈다. 연습하듯이 공연하는 배우들을 보면 참 편하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 큐를 놓치는 조명이나 무대전환이 벌어지면 그들의 직업 윤리를 의심해보게 된다. 예술가의 혼으로 관객을 압도하길 바란다면 무리일까? 웃음을 준다 할지라도 정제되고 치열하게 연습된 예술가의 땀방울이 베어나와야 티겟값이 아깝지 않은 것 아닐까? 

마음을 다잡고 극장으로 향한다. 당분간은 그저 구경나온 아저씨의 자세로 보이는 만큼만 애기하려 한다. 연극을 보는 연습을 10년이나 하지 않았으니, 내게도 준비기간이 필요하지 싶어서이다. 글을 쓰는 것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준비운동 없이 내달렸다가는 어지러운 판에 쓰레기만 보태는 꼴이 되기 싶다. 차근차근 몸만들기를 하듯, 극장을 살피는 맑은 눈을 되찾으려 한다. 그리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면 둘 중의 하나이다. 나의 눈과 말이 제대로 살피지 못했거나, 연극이 관객을 잃어 생명이 꺼져가고 있거나... 어쨌든 이 걸음은 혼자만의 싸움이다. 상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정한 규칙과 기준을 넘어서는 '길닦기' 같은 걸음이다. 

아마도 이제는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글루스 가든 - 제대로 된 글 쓰기.

by 혼자밥먹는남자 | 2008/12/01 00:55 | 극장의 사잇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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