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번째 이야기] 익숙해지는 것들, 잊혀지는 것들, 그리고 남은

## 익숙해지는 혼자 되기 ##

주말마다 혼자 저녁을 먹고 장을 보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밑반찬을 고르는 데에도 눈썰미가 늘고 있고, 남는 음식물 쓰레기들이거의 나오지 않을 만큼 식재료들을 관리하는 것에도 계획성이 붙고 있다. 손이 젖는 시간이 늘고, 설겆이를 끝내고 핸드크림을 무의식적으로 바를만큼 '살림'이라는 것이 몸에 익숙해지고 있다. 카트를 혼자 밀고 다니는 것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사야할 것들을 특별히 적어두지 않고도 적당한 타이밍에 사두어야 할 것들을 챙길 줄 알게 된 걸 보면, '혼자 장보기'가 슬며시 일상의 문을 밀고 들어오고 있는 걸 받아들이고 있는가보다.

불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집안 일이라는 것이 본래 한다고 티가 나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게을리 해도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곰팡이 피어오르듯 퍼져나가기 마련이어서, 어떤 사명감이나 가치를 스스로 부여하지 못한다면 채 몇년을 버티지 못할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사명감이나 가치에 대해 한 마디쯤 고마움의 표현이랄까, 그 돌봄에 의해 빛이 나는 어떤 보람을 얻지 못한다는 데 있다. 혼자 몸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까닭은 그닥 힘을 더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값진 어떤 것을 위한 지향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없이 입에 반갑고, 몸에 해로운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우겨넣곤 한다. 맥주캔이라던가 튀긴감자나 닭다리 같이 입을 호사롭게 하지만 뱃살을 늘리기만 할 반갑지 않은 것들에 대해 너그럽다.

## 잊혀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 : part 1 ##

내겐 가족이 있었다. 아내와 두 아이. 부모님, 그리고 형제와 형수들, 조카들... 가족의 끈을 어디까지로 보는가는 미묘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 범위가 모두에게 똑 같은 것은 아니다. 가족이란 '주어지는' 경우와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글럴 때 사람들은 '가족과 같은', 이라거나 '가족이나 다름없는'이라는 표현을 하곤 한다.

내게 주어진 가족들은 헬리혜성이 태양계를 벗어나듯 멀어지고 있다. 그들이 다시 가족의 자리로 돌아오는 일은 그 혜성보다 조금 자주 돌아온다. 만들어진 가족은 소위 말하는 '가족 행사'를 위해 존재한다고 봐도 좋다. 그들과 공유하는 것은, 서로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매개로 관계가 생겨났던 딱 그만큼의 출발점을 가질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실제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스스로 '가족의 가치와 관계'를 공유하는 것에 있다. 일상을 공유하고, 서로의 삶의 궤적에 들락거리며 서로 돕거나 짐이되기도 하겠지만, 그 어떤 의미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그 누구와도 어떤 의미를 나누어갖고 있지 못하다.

일상에 대해, 웃음을 띄거나 마음이 무겁게 되거나 하는 이야기들, 과거와 미래의 어떤 소중한 기억과 소망에 대해, 기쁨과 슬픔, 좌절과 열망, 고독이거나 일체감이거나... 무엇인가를 나누어야 하는 그 어떤 정서와 생각에 대해서도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감정과 생각이 느리게 움직였고, 더 많이 더 깊게 흔적을 남기는 사건들에 대해 감당하기에 힘겨웠기 때문에, 마음의 안쪽에서 흔들리는 가여운 목소리가 누구에게도 다가가 들려지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관계라는 것도 그저 형식에 불과했다.

결코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얼기설기 엮인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버석버석한 껍질을 드러냈고, 안쪽에서부터 힘없이 부스러져 내렸다. 의미없는 타인의 거리로 멀어지는 사람들을 붙잡기에는 애초부터 물기가 너무 부족했는지도 몰랐다. 관찰자의 거리를 부여밭고 태어난 존재는 그렇게 항상 혼자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가족은 갈릴레오 위성처럼 서서히 내 존재의 궤도 바깥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 섭리를 거역할 수는 없다. 애초부터 직선궤도로 설계된 타인을 갖고 태어난 것은 저주인지도 모른다.

## 잊혀지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 : part 2 ##

한 때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 어떤 일을 함께 하거나 열망을 함께 갖고 있어서, 혹은 함께 헤쳐나가야 했다거나 공통의 적이 있다거나... 그렇게 만나 어떤 시점까지 그들과 일상을 공유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고,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를 살피게 되었던,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Ubi Sunt?)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어 영원한 관계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듯, 그 때의 그들도 오늘의 그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멈추지 않는 변화를 거역할 수 없듯... 모든 것을 품에 안고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의미화에 대한 현명한 노력을 한다면,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만남의 의미를 싹틔우고 깊게 뿌리내린 관계를 가꿀 수도 있다. 변하고 이즈러지고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까지도 차분히 담아 나누어가질 수 있다면... 아마도 그 관계는 '영원'과 같은 생명력을 가질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들에 대한 희미한 소망만큼 인간적인 바람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만큼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아픔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만큼 공감을 얻는 감정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한 때 아주 짧은 시간, 꿈과 희망을 함께 하며 서로의 삶 속으로 깊숙이 뿌리내렸던 그 사람들... 그들이 혜성과 같은 타원 궤도를 가졌는지, 탐사위성과 같은 직선 궤도를 가졌는지 지금으로선 분별하기 어렵다. 아마도 내게 남겨진 의미의 덩어리가 각설탕처럼 녹아내리는 속도만큼, 나는 그들에게서 멀어지고 있을 뿐이다. 움직임은 상대적이라고 하던가? 나는 그들에게서 위성이었던지, 스쳐가는 별똥별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소망한다면 머무를 수 있었던가?

어쩌면 내 존재가 단 하나의 직선만으로 이루어진 영원한 방랑의 궤적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데도, 정작 나의 온 존재를 올려놓은 대지가 나의 뜻과 상관없이 저 먼 어딘가를 향해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말이다. 언제고 한 때 영원히 머무르기를 소망했던 어떤 만남은, 그 끝이 이미 예고된 '우연한 조우'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또 그 누구를 만나든 그들 또한 얼마간의 공유된 시간을 뒤로하고는 희미해지는 기억만을 남기고 사라져가게 될 존재라고 보아야 하는 걸까?

"헛 되고, 헛 되고, 헛 되도다"

인생은 결국 긴 그림자를 드리운 빈 무대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 그리고 남은 ##

빈 무대를 채우는 것은 아우성의 메아리와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빛의 그림자일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은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지는 법이다. 시작과 끝 사이에는 가녀린 떨림과 숨막히는 침묵이 남곤 한다. 이별이란... 그 수 많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끼인 비명과도 같다.

소통되지 못한 이야기는, 자꾸만 어긋나는 어휘들을 빵부스러기처럼 남기고, 한 때, 그 어떤 봄날을 아름답게 채워주었던 치즈케이크는 한 조각, 한 조각씩 추억의 아릿함으로 소화되고 있다.

그 어느 날, 그녀의 손에 끼여진 반지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도 달려들지 모른다. 함께 나누어 가지고 있던 삶의 조각들이, 허약해져가는 기억에 버림받고, 새로 두텁게 쌓인 일상의 퇴적층에 파묻혀 찾지 못할 그림자로 흩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지 ...
눈을 가늘게 뜨고,
해가 지는 거리의 반대편 끝에 아른거리는 이미지를 주억거려본다.
그리움인가, 쓸쓸함인가, 가슴아픈 아련함인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시장의 갓길을 따라 걷는다. 장바구니는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이글루스 가든 - 이글루 소설가 동맹

by 혼자밥먹는남자 | 2009/02/15 00:44 | 혼자 밥 먹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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