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05일
서늘한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든다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생각을 해두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혼자만의 헛된 바램에 겨워, 빈 틈을 만들어두었나보다.
"미안해요"
마음이 부들부들 떨렸다. 1월이라고는 해도, 이리 시리지는 않았건만, 찬물을 뒤집어쓴 것 마냥... 손이 떨렸다.
"괜찮아요?" "아니"
얼음 송곳이 가슴에 박힌듯 몸이 식어갔다.
그녀의 뒷 모습을 처음 눈여겨 보았던 거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머리를 조금 자른 모습이 약간 낯설었고, 퀭한 얼굴과 메마른 입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게 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했다. 만나러 가기 전 약국에 들러 갤포스를 먹었다. 속이 쓰리고 울렁거려 계속 헛구역질이 일었기 때문이다.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일부러라도.. 웃음을 주고 싶었다.
죽이라도 먹일 심산으로 일식집을 갔지만, 전복죽도 안 된다고 한다. 평소같으면 다른 곳으로 올기자고 했겠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우리에겐 단지 두 시간여 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그저... 힘에 부치는 유머라도 섞어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눈이 자꾸만 아렸다. 전기 히터를 세게 틀어달라고 했지만 방안은 얼음창고처럼 추웠다.
그녀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었다. 젓가락이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가 겪어야 할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어진 관계란... 조금씩 조금씩 그 금이 퍼져가고, 갈라지는 마음의 결을 따라 서로에게 상처를 안기곤 했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 그녀는 울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슬피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강하고 단단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얼마나 힘들었기에 ... 하며 마음이 아렸다.
손을 잡아주었다.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뺄까?" "아니 ... 끼고 있어 ... 쭉..."
나도 내 길을 정해야 했다. 만 삼천원이나 하는 대구탕이 온통 쓴맛 투성이었다. 감정이 15층과 지하 3층을 빠른 속도로 오가는 엘리베이터 같았다. 담담한 농담을 하기도 했지만, 눈이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고 충혈되는 걸 어쩌지는 못했다. 눈은 울고, 입은 웃으며 그렇게 그녀를 보내주어야 했다.
담배를 사와 나누어 피며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마셨다. 그녀는 나를 따라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됐다고 했다. 담배를 보헴 1m로 바꾸어야겠다고 했다. 와인을 마시지 못하게 된 것이 가슴아프다고 했다. 어제 혼자 치즈케익을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창밖 풍경이 을씬년스러웠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재떨이에는 금새 꽁초가 몇 개씩 쌓였다. 캐나다로 갈까 한다고 얘기했다. 현실감은 별로 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그것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진을 많이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기다리겠다고 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라고 했다. 행복해져야 한다고 했다. 감정이 얼어붙어서 그런지,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몇 일이고 지나서 많이 아플 것 같았다. 아프지 말라고 했다. 그럴 수 있을까?
그녀가 걸어가야 할 길이 외롭고 힘겨워보였다. 지켜줄 수도 없고, 이야기를 들어줄 수도 없고, 어깨를 빌려줄 수도 없다. 1년에 한 번씩만이라도 볼 수 없을까 하고 간청해보았다.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비로소 나는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었다. 혼자... 물끄러미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 모진 결심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들지 마음이 저렸다. 저미어지는 마음을 도닥여보려다.... 화장실에 갔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울음은 마음 속으로 차고 넘치고 있었고, 그건 이제 나의 몫이었다.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보고싶으면 어떡하지? 대답은 없다.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인줄 알고 있었지만, 서늘한 바람이 어깨 속을 파고 들었다. 무릎이 저리도록 떨렸다.
"손 좀 줘봐요"
꼭 안아주고 싶었다. 기억할 수 있게, 오래도록 그 냄새를 기억할 수 있게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제는 조금씩 연습을 해야한다고 차가운 이성이 명령했다. 담배 두 개비를 나누어 피우고 일어섰다. 바래다주고 싶었다. 나의 손이 참 따듯했다고 얘기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손을 꼭 쥐어주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몇 분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름은 낮고, 바람은 딴 세상으로 불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어깨를 기대왔다. 이젠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20년... 긴 시간이다. 어떤 약속이라도 견뎌내기 힘든 긴 시간... 나는 이 기다림이 유통기한 20년을 견딜 수 있을지 자문해보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겁이 났다. 그 두려움이 20년을 간다면, 아마도 나는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이 세월에 녹아 흩어질 수 있다면, 그리움에 겨워 서성이기도 할 것이다.
"선물은 보내도 되지?"
그렇게... 그렇게 마음의 아픔을 정리하고, 기억 속의 미소를 비춰보며,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여자들은 현실에 충실하더라"
아픔을 잘라내며 그렇게 얘기했다. 사납고 모질게 굴었던 까닭을 고백했다. 이젠... 진짜 헤어짐의 시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차는 정체되지도 않고 무정하게 거리를 달렸다. 그녀를 내려주고 한참을 뒤돌아보았다. 어지러움 때문에 절로 신음을 토해냈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언제고 힘들면... 돌아와. 기다리고 있을게"
"좋은 사람 만나서... 꼭 행복해지세요. 네? 아프지 말아요."
"착한척 하는 거 ... 지겹다"
눈을 감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혼자됨을 곱씹어보았다. 문득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가 덩그마니 바라보고 있다. 자리를 옮겨 그녀의 자리에 앉았다. 손 안에 남은 희미한 향기를 맡으며, 서럽게 울었다.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괜찮다. 괜찮다. ... 아니 괜찮다.
# by | 2009/01/05 15:13 | 말하지 못한 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