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한 번의 행복과 웃음을 빼앗긴 형벌

## 웃을 수가 없는 이유  ##

아무도 그리 하라 하진 않았지만, 웃는 법을 잃어버렸다. 'Mr. Smile'이 웃음을 잃어버렸다. 아침마다 억지로라도 웃음을 지으려 입근육을 풀어보지만, 조금만 다른 생각에 빠지면 얼굴이 굳어져버린다. 

'웃어요. 웃는 모습이 예뻐요.' 

피식 웃음을 흘려본다. 

'자꾸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군' 

그는 문자가 서툴다. 관심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얼마전부터 문자를 받는 일도, 보내는 일도 익숙해졌다. 아내의 핸드폰이 뻔질나게 울리는 건 그저 학부모들이려니 했다.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생각이 미치며 다시 얼굴이 굳어진다.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사람은 내가 다가간 것일까, 그가 다가온 것일까? 

'점심 뭐 드실래요?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나는 젊은 여자들이 무섭다. 그들의 호기심거리가 된 건지 불안하기도 했고, 나의 남자가 오래전에 끝났다는 사실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했다. 아내가 등을 돌리고 잠들기 시작한 건 벌써부터 오래전 일이다. 그것이 나의 잘못이던가? 이리 손짓하는 여자들의 유혹은 내가 불러들였던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다. 중년의 남자에게서 무얼 기대할 게 있다고... 

"그건 호기심이에요. 뭐 경우에 따라선 아버지같은 느낌에 끌리는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의례적인 친절에 당신이 너무 민감한 것일 수도 있고. 후후 그런데 재밌네... 자기한테 관심을 둔 여자가 또 있단 말야? 인기 폭발인걸?" 

'나는 여자들이 무섭다.' 

여자들은 유혹하고, 밀쳐내고, 혼란스럽게 하고, 무관심해진다. 
그는 어느 틈엔가 그 여자의 저울추 한 켠에 올려진다. 반대편 저울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는 온전히 자기자신이 될 수가 없다. 
여자들은 꿈을 꾼다. 그들의 꿈 속에 있는 남자는 실체가 없다. 그것은 그저 이미지일 뿐이다. 반대편 저울에는 그 이미지가 버티고 서있다. 그 이미지와의 대결에서 결단코 승리자가 될 수 없다. 패배가 예고된 싸움에 여자들은 남자를 끌어들인다. 

긴장을 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어렵다. 미리 앞질러 내달리는 파국의 모습에 짖눌려 아무하고도 제대로 된 관계라는 것을 맺을 수가 없다. 거래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발가벗은 영혼 그대로의 만남이란 성립될 수 없는 것일까? 어린 아이를 대할 때에도 웃음을 지을 수가 없다.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이 두렵다. 

## 외로움은 관계에서 비롯되고, 고독은 본질적이다 ##

사람과의 관계 맺음에서 그는 늘 패배자의 몫을 떠안아야 했다. 아무도 그리 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때리느니 맞는 것을 택하는 것만큼이나 상처를 주기보다는 상처를 안고 견디는 편이 쉬웠다. 그렇게 느꼈다. 적어도 침묵이 상대방에게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깁밥을 우겨넣으며 콜라를 마신다. 일에 재대로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시간에 쫓긴다. 사람들과 어울려 점심을 먹는 일이 큰 즐거움이자 위안이기도 했지만, 회사에 도는 이상한 소문을 엿듣고는 그만 퍼뜩 모두에게 거리를 두게 된다. 본부장이라는 자리는 그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뒷면의 이야기 따위야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유력한 차기 본부장 후보가 한직이나 다름없는 신사업팀으로 발령이 났다는 사실이고, 그 신사업이라는 게 그저 허울뿐이라는 소문이 있는 만큼, 그들의 눈에는 경쟁에서 승리한 그가 무슨 특별한 술수라도 썼겠거니 생각하는 것이다. 그 신사업이라는 것이 회사의 분할 합병의 주축이 될 것이라던가, 지금의 사업부는 계열분리 형태로 독자생존을 모색해야 한다거나 하는 사실을 그들이 알리가 없다. 알고 있다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왜 혼자 밥을 먹고 그래요? 맨날 그렇게 김밥으로 때우다가 속 버려요' 

문제의 그 신사업팀 팀장이 그에겐 너무 힘들다. 그녀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있다. 그의 남자가 끝나갈 무렵, 아내의 핸드폰이 눈에 띄게 문자알림을 토해낼 무렵,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 네가 좋은데 어떡하냐?' 

술을 아주 많이 마신 어느 날 회식 뒷자리였다. 다른 임원들과 본부장들이 따로 자리를 마련해 폭탄주를 돌렸다. 회사의 성장과 함께 신입 부서장이 된 그녀를 위한 축하 파티 자리였다. 대견했다. 자랑스러웠고, 미묘한 흥분도 느꼈다. 그녀를 스카우트한 건 나였다. 출산 직후라 일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부정적 의견을 뒤로 하고, 고집스럽게 밀어붙여 직속 팀의 팀장으로 만든 것도 나였다. 그녀에겐 젊은 시절 내게 느껴지던 사나운 투쟁본능 같은 것이 있었고,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해 사회적인 핸디캡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 핸디캡을 이겨내기 위해 보통 이상의 노력을 했다. 나는 기꺼이 그런 열정의 후원자가 되고 싶었다. 

굳이 가야 한다는 그녀를 끌고 바에 데려가 얘기했다. 

'나 네가 좋은데 어떡하냐?'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이 없었다.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녀의 한쪽 손을 꼭 쥐고 엎어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나에게 비밀이 생겼다. 아내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비밀. 그녀의 마음에 기대고 있다는 비밀. 어느 쪽이 어느 쪽을 불렀을까? 아니면 그저 별개의 비밀인가? 세상 사람은 다 아는 나만 모르는 비밀인가? 

격려는 관심으로, 관심은 애정으로, 애정은 의지로, 의지는 관계로 이어졌다. 
실망은 무관심으로, 무관심은 경멸로, 경멸은 배반으로, 배반은 열정으로 그렇게 이어졌을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충족되지 못하는 외로움을 남긴다. 쓰다만 보고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지막 김밥 두 개를 입에 넣고 콜라를 마신다. 한손으로 콜라를 마시며 한 손으로 문자를 쓴다. 

'외로움은 관계에서 비롯되고, 고독은 본질적이다' 

아무것도 기댈 수 없다. 기대서는 안 된다. 기댄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또 다른 관계의 그믈망을 펼친들 구멍 뚫린 공허함은 매워질 수 없다. 그 구멍에다 대고 숱한 사람들이 주먹을 넣었다 뺐다 할 것이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간섭받지 않으려면 통념에 타협해야 한다. 통념을 거부한 이상 고독은 피할 수 없다. 비밀이 생긴 것이다. 

## 모두다 가질 수는 없어 ... Es muss sein ## 

저녁을 먹는 일이 가장 어렵다. 회사사람들과 먹으려면 일을 만들어야 했고, 야근을 하기 위해 먹는 밥이 달가울리 없는 직원들과 밥을 먹으면 꼭 마음 쓰게 만드는 날 선 말들이 밥상 위를 기어다녔다. 회사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 밥을 먹으려면 약속을 만들어야 했고, 마땅한 약속이 없으면 결국 또 혼자 먹어야 했다. 관계에 실패했다는 반증은 너무나 뚜렷했다. 

그녀는 점점 바빠졌다. 신사업팀은 인수합병에 대비해 정예 인력을 추려내야 했고, 그들이 발령장을 받는 순간, 하나의 배는 두개로 나뉘어져 각자의 항로를 선택해야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일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일을 얘기하는 것은 불편한 감정만 쌓이게 했다.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도 젤리같은 이물감이 밀쳐내는 것 같았다. 

"나 가봐야 해요. 괜찮죠?" 
"......" 
"요새 계속 눈치보인단 말이에요. 회사 때문이라고 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경쓰여."

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 매달리는 모습은 싫다. '데려다줄까?' 나른하기도 하고, 가는 동안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알수가 없다. 

"언제부터래?" 무심코 얘기가 튀어나왔다. 
"일 애기 안 하기로 했잖아. ... 알고 싶어?"

후회는 늦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이야기를 꺼낸 다음 그것을 주워담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 다음 달. ...... 그쪽에 새 사장이 올 거야. 잘 지내봐... 좋은 분이셔."
"아는 사람?"
"응 본사의 강부사장. ...자기 동기잖아"

나는 이제 회사를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내게 남은 선택은 그뿐이다. 

"잘 지내봐. 친하잖아. 둘이 잘 하면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거야."

나는 아주 먼 거리감을 느꼈다. 내게 남은 선택은 굴욕을 견디거나 준비되지 않은 이직뿐이었다. 이 회사를 키우느라 바친 10년이 내게 남긴 건 얼마간의 퇴직금과 처분할 수 없는 주식, 내손으로 뽑은 젊은 인재 몇이 전부였다. 그것을 위해 내던질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인생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나의 밧데리는 완정방전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갈게... 전화할게." 

딸깍 하고 문이 잠겼다. 그녀가 걸어가는 걸음 소리가 차츰 멀어져간다. '땡' 하고 앨리베이터 소리가 난다. 긴 침묵이 방안을 채웠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혼자였는지도 모른다. 다시 담배를 피워물고 창밖을 내려다본다. 아주 오래 된 기억처럼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행복해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은 결코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승자와 패자로 갈렸다. 아무도 그것을 원치 않았지만, 아무도 그리 하라고 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 몫의 짐을 지고 또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밖에? 모두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올라가는 쪽이 있으면 내려가는 쪽도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 무엇을 얻는다면, 또 누군가는 그 만큼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긴 양팔저울 끝에 지나온 40년의 인생이 놓였다. 반대편 끝에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남은 얼마간의 시간이 놓였다. 그것이 얼마만큼의 높이인지, 얼마나 빠르게 내려갈지 알 수 없다. 다시 올라갈 수 있을지도 알수 없다.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어정쩡한 선택은 결국 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없이 떨어지는 어둠 속에서 바닥이 어디일지 알수가 없었다. 

일과 가정이 저울추에 올라갈때, 나는 일을 택했다. 의구심과 믿음이 겨룰 때 나는 의구심에 손을 들었다. 설득과 체념을 놓고는 체념에 몸을 실었다. 망가진 나의 영혼과 아이들을 놓고는... 나의 영혼을 택했다. 누구도 그리 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둘 다 가질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 할 밖에? 그리 할 밖에... 자존심을 택한 이상 내어놓아야 할 것이 더 많았다. 더 내놓을 것이 남았단 말인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귿은 얼굴을 한 나에게 속삭인다. 그리 할 밖에... 
외로웠다. 고독하다. 이 둘은 왜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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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혼자밥먹는남자 | 2008/12/08 00:05 | 혼자 밥 먹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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